<style type="text/css"> <!-- .style12 {color: #0000FF} --> </style> <span class="style3"><span class="style3"><span class="style3">자유게시판</span></span></span>
총신 75회 동창회 멀티 Page입니다. 환영합니다.
목회 자료실

 로그인  회원가입

머슴을 섬긴 주인 조 덕 삼 (1867~1919)
administrator  (Homepage) 2009-08-22 21:10:37, 조회 : 687, 추천 : 31
- Download #1 : 1_L_1248069170.jpg (25.3 KB), Download : 13

- Download #2 : 1_L_1248069170_1.jpg (50.9 KB), Download : 11


이연경 (기사입력: 2009/07/20 14:52)

“목사님! 아버지께서 숨을 잘 쉬지 못하십니다. 빨리 와보세요.”
“장로님, 장로님, 저 이자익 목사입니다.”
이 때 잠시 조덕삼 장로는 눈을 떴다. 꺼져가던 숨을 고르고 둘째아들 조영진과 셋째아들 조영환에게 유언을 남겼다.

“절대로 우상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마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
당시 큰아들 조영호는 고국을 떠나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있던 때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죽었다고 해서 눈물 흘리지 말고 내가 즐겨 부르던 찬송을 불러 주려무나.”
이자익 목사는 조덕삼 장로가 불러 달라는 찬송가(21세기 새찬송가 221장)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다시 만나리.”
이 찬송을 들으며 조덕삼 장로는 길지 않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1919년 12월 17일, 52세의 나이였다.

-----------------------------------------------------------------------------------------------------------


◇조영호 장로
하늘로 돌아간 금산 지역 믿음의 씨앗
“장로님, 우리를 두고 어디를 가십니까. 장로님께서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저를 마부로 써 주시고 또 장학금을 주셔서 평양까지 유학 보내주셨는데….”
조덕삼 장로의 소식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모두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각 마을로 다니면서 외쳤다. “오늘 아침에 조덕삼 장로님은 천국에 가셨습니다.” 조덕삼 장로의 바람대로 이것이 부고의 전부였다.

금산교회 당회는 5일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밀려드는 조문객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만장은 붉은 색으로 만들어졌다. “祝 召天 趙德三 長老(축 소천 조덕삼 장로)”라는 내용도 있었고, 당시 유교 문화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만장 행렬을 따르는 인파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다.

1920년 새해를 맞아 이자익 목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영호 집사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알렸다. 2월 중순 경 귀국한 조영호 집사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묘소에 가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이자익 목사를 찾아간 조영호 집사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목사님을 잘 돕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자익 목사는 “조영호 집사님이 대를 이어 장로로 시무해야 합니다.”라고 강권했다. 조영호 집사는 “아직 자격이 안 됩니다. 지금은 유광학교를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말로 사양한다.


◇금산교회 청년기도회 3주년 기념(1941) 앞줄 중앙이 조영호 장로
민족 교육을 위해 유광학교를 설립한 조덕삼 장로
유광학교의 설립은 1905년, 일본이 병력을 동원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나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덕삼 장로(당시는 영수)는 민족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과수원을 팔아 그 금액으로 금산교회 옆에 학교를 신축했다.

1906년 금산교회 내에 세운 유광학교(維光學校)가 그곳이다. 건평 40평 정도로 교실 2칸이 있는 초가집이었다. 당시 마을 한문서당을 다니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유광학교에 입학했다. 초대 교장은 조덕삼 장로로,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갈 청소년을 교육시켜야 한다며 교육에 매진했다. 소문이 나면서 금산리뿐 아니라 금산면 일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유광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쳤다. 또, 한글을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쳤다.

조덕삼 교장은 어린이들의 체력을 키우기 위해 조영호 교사로 하여금 축구부를 신설하게 했다. 조영호는 조덕삼 장로의 장남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전주에 설립한 신흥학교 축구부원이었다. 김제에 최초로 ‘축구’를 소개한 터였다.

이후 유광학교는 조영호 집사가 교장으로 취임한다. 조영호 교장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떠올리며, 매년 8월 29일을 국치일(國恥日)이라 하여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그리도록 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면서 태극기를 그렸고 그린 태극기는 책 보따리 깊숙이 넣어서 집에 가져다가 장롱 안에 숨겨 두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후 전주 신흥학교에 다니던 유광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금산에 왔다. 전주에서도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을 전했다. 유광학교 학생들은 집으로 달려가 장롱 깊숙이 숨겨 놓았던 태극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다.

이때 금산교회 교인들 중에서 조영호 교장을 비롯해 김두현, 김명모, 김종규 교사 등이 만세 운동의 적극 가담자로 김제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끌려 다니며 곤욕을 치렀다. 조영호 교장은 얼마 동안 김제경찰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자 그 길로 만주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ㅍ 故 조세형 장로의 유해는 20일 오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선영에 묻혔다. 연합뉴스
문맹 퇴치와 민족 교육에 앞장선 동광학교
아버지 조덕삼 장로의 소천 소식에 다시 귀국한 조영호 집사는 유광학교를 이어간다. 이후 조영호 교장은 유광학교를 동광학원(東光學院)으로 개명한다. 유광학교가 김제지방에서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쪽에서 빛나는 학교가 되자’는 의미를 담았다.

이자익 목사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으로 경남 거창 선교부로 목회지를 옮기자 전북노회 전주 서남 지방을 담당하던 서국태(D. A. Swicord) 선교사가 당회를 관리하게 된다. 공동의회를 소집해 장로 1인을 선출하게 되는 데 이때 조영호 집사가 장로로 피택된다. 조영호 집사는 1926년 6월 10일 서국태 당회장의 집례로 장로 장립을 받는다.

일본 경찰의 감시는 날로 심해졌다. 1941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학교마다 가미다나(가정이나 사무실 등에 설치하는 소형 사당)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일제는 각 교회마다 ‘국민정신총동원 야소교장로회 지부’를 조직하게 하고 전쟁에 조달하기 위한 쇠붙이를 거두어 바치게 했다. 금산교회의 종을 공출로 빼앗아간 것은 물론이고 교회 감시가 어려워지자 청도리교회와 금산교회를 폐쇄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조영호 장로는 동광학원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금산면 면소재지에 있는 원평초등학교로 편입학시켰다. 동광학원 건물은 야학당으로 변신하는데, 금산교회와 구봉교회(현 원평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은 곽진근 목사의 지원으로 한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금산면의 문맹퇴치 운동 소식을 들은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 모여들어 동광학원은 향학 열기로 뜨거웠다.

조영호 장로는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의 의식 개혁에도 앞장섰다. 음력설을 폐지하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연도인 서기력(西紀曆)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새해를 맞으면 양력 설을 쇠도록 계몽했다. 청년들에게 농사법도 가르쳤는데,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배나무를 심고 과수원을 운영하라고 권했다. 하루 한 끼 때우기도 힘든 때 일꾼들을 모아 같이 밥을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영호 장로의 집 사랑방은 항상 열려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장소이자 민족의식을 불어 넣는 곳이기도 했다.


◇조성훈 집사
민족의 해방과 조영호 장로의 죽음
조영호 장로는 밤마다 라디오를 들었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자 곧바로 금산교회 교인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손수 만든 태극기를 들고 금산리에서 면소재지인 원평까지 행진을 했다. 행진 후 금산교회로 돌아온 조영호 장로는 폐쇄되었던 교회 문을 열고 청소를 깨끗이 한 후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좌익 세력이 나타났다.

좌익사상을 가진 금산리 청년들은 남로당 입당원서를 들고 다니며 교인들을 괴롭혔다. 밤이면 모악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돌멩이와 몽둥이로 조영호 장로 집을 덮치기도 했다. 조영호 장로는 좌우익 혼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또 교계 선배인 한상용 장로의 국회의원 선거를 돕기도 했다. 조영호 장로는 1949년 53세의 나이에 피로와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금산교회는 큰 슬픔에 빠졌다. 조영호 장로와 사별 후 홀로 된 이영숙 권사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장남 조세형과 식솔을 이끌고 전주로 이사한다.

금산교회 문화재 지정과 3대 장로의 탄생
1950년 6·25 발발 후 빨치산의 습격으로 금산리 일대가 불탔을 때도 건재했던 금산교회. 1994년 무렵 조덕삼 장로의 장손인 조세형 집사는 100년을 맞게 될 금산교회 예배당을 지방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유종근 전북도지사에게 호소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으로 활동하던 조세형 집사는 교회역사가 김수진 목사, 금산 원평교회 출신 김종원 장로, 김종석 장로, 이인수 담임목사 등과 함께 ‘문화재 보존 발기위원회’를 발족했다.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이곳을 답사한 후,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한국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잘 결합시켜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구조를 지닌 건물’로 판정하고, 1997년 7월 18일 금산교회를 전라북도 문화재 제136호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조세형 집사는 1931년 8월 22일 금산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유광학교에서 1년 과정을 수료하고 원평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6년제 전주 북중학교(현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한 후 언론계와 정계에 투신한다. 조세형 집사는 1999년 12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장로 장립을 받은 금산교회에서 3대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된다.

故조세형 장로의 장남 조성훈(42·하나대투증권 부장) 집사는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무학교회에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다. 지난 2001년 조세형 장로가 주일대사로 일본에 가있는 동안에는 아버지 대신 한 달에 한 번 금산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조성훈 집사는 “조덕삼 증조 할아버지때부터 믿어 온 그 신앙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조덕삼 장로로부터 시작된 한양 조(趙) 씨 집안의 신앙이 4대를 이어 교회의 산 증거로 잔잔히 흐르고 있다.

인터뷰-김수진 목사

김수진 목사는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사에 정통한 역사가로 현재 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과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전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광주전남기독교역사>를 집필했고, 금산교회 역사와 이자익 목사 전기를 썼다. 조덕삼 장로 전기를 쓴 역사가로는 유일하다.

1994년 1월 1일부터 <전북일보>의 요청으로 전북지방 개신교 선교 100년 역사를 기고했다. 전북지방 개신교 100년사부터 시작해 각 지역별 역사를 깊이 있게 정리 발표했는데, 그 중 1994년 8월 26일자 <전북일보>에 “금산교회는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실었다. 그 기사가 나가고 난 뒤 금산교회를 문화재로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고, 故조세형 장로 생존 당시 금산교회의 ‘문화재 보존 발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책으로도 써내게 되었다.

금산교회 이인수 목사는 ‘조덕삼 장로님을 시대를 앞서 간 분’이라고 표현한다.
서울에 천민이 먼저 장로가 된 교회들이 몇 있다. 승동교회 같은 경우는 백정이, 연동교회는 갖바치(가죽신을 만드는 장인)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었다. 결과에 불순종한 양반들이 나가서 A교회와 M교회를 각각 세웠다. 유일하게 금산교회만 머슴이 먼저 장로가 됐는데도 순종하고 섬겼다. 장학금을 줘서 목사 과정까지 마치게 하고 목사가 된 후에 담임목사로 초빙하기까지 했다. 한국사에 이런 예가 없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조덕삼 장로님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 있다.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31  교회가기 싫은 이유(77-3 말 많은 전도사(전도하는 사람) 너무 싫어!).    administrator 2009/10/08 18 788
30  교회가기 싫은 이유(77-2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어 교회 못 간다).    administrator 2009/10/08 22 654
29  교회가기 싫은 이유(77-1 노방전도 모습 보면 만정이 딱 떨어진다).    administrator 2009/10/08 28 706
28  기독교 상식    administrator 2009/10/08 26 733
27  설교준비 이렇게 하라    administrator 2009/09/22 25 647
26  교회 돌파구 ‘전도뿐’    administrator 2009/09/22 25 720
25  설교학의 교과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administrator 2009/09/22 23 694
24  “설교란 무엇인가?    administrator 2009/09/22 30 759
23  장로 안수    administrator 2009/09/14 21 648
22  조각목    administrator 2009/08/30 23 817
21  아멘을 잘하는 성도가 공부도 잘한다”    administrator 2009/08/22 28 874
 머슴을 섬긴 주인 조 덕 삼 (1867~1919)    administrator 2009/08/22 31 687
19  주승중 교수 “성경에 충실한 것이 가장 예언적인 설교”    administrator 2009/08/13 28 794
18  pst/십자가의 재의미    administrator 2009/07/14 25 760
17  주님의 보혈    administrator 2009/07/14 28 1068
1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음악    administrator 2009/07/10 26 821
15  사순절 QT    administrator 2009/07/10 31 748
14  너 주님의 가시관 써 보라    administrator 2009/07/10 23 902
13  나의 주 나의 하나님    administrator 2009/07/10 31 838
12  기독시 : 오늘을 비관하기에는.....,/작자미상    administrator 2009/07/10 23 853

    목록보기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2][3][4] 5 [6]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