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type="text/css"> <!-- .style12 {color: #0000FF} --> </style> <span class="style3"><span class="style3"><span class="style3">자유게시판</span></span></span>
총신 75회 동창회 멀티 Page입니다. 환영합니다.
목회 자료실

 로그인  회원가입

장로 안수
administrator  (Homepage) 2009-09-14 09:51:16, 조회 : 644, 추천 : 20

경솔히 장로 안수하지 말자

한국교회 장로도 문제,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즈음하여

  
지금 전국적으로 목사와 장로간의 불협화음이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 성서로나 교회법으로나 목사는 말씀과 가르치는 직임이며, 장로는 교회를 위해 '봉사'(다스리는 것)하는 직임을 맡았다. 이 두 직임을 세분하면 목사는 지교회의 당회장이 되고, 장로는 당회의 회원이 되어, 장로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구성된다. 목사는 교회의 양들을 먹이는 전문인으로서 목자이고, 장로는 세상직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목사를 보필하면서 교회를 위한 봉사와 교회질서를 바로 잡는 직책이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특별히 말씀과 신령한 교제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호흡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로는 목사를 존경하고 섬기고, 보필하는 자라고 하겠다. 또 목사는 장로가 하지 못하는 고유한 직임이 있다. 장로를 비롯한 교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전달, 교훈, 축도권을 가지며, 세례와 성찬을 베푸는 자는 오직 목사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장로가 침범할 수 없는 목사의 영성적 권한이라고 하겠다. 그 대신 장로는 목사의 육으로 사는 생활, 목사 자녀교육, 목사가 연구할 수 있는 연구도서 및 목사가 목양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거처(사택)를 마련하여 예산을 책정. 집행하는 목사의 한 인간으로서 사는 생계를 책임진다.

쉽게 말해서 목사는 장로를 위시한 교인들의 영적문제를 담당하고, 장로는 목사의 육의 삶을 책임지는 교회의 대표자다. 온 교인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교인들의 영적문제나 인간적 문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런 사실을 목사에게 그 형편을 전달한다. 이렇게 두 사이를 구분해서 자기 할 도리를 하면, 아름다운 조화가 울려 퍼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원론적인 것이 제대로 두 수레바퀴가 굴러가지 않고 '삐꺽' 소리가 나니 문제다.


조화의 원칙


목사와 장로는 목회하는 중에 사적이든, 공적이든 의견이 대립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장로는 직접적인 문제를 숨기고 "설교가 어떻다" 리더십이 어떻다든지, 또는 목사의 도덕성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서 도전해 오는 수가 많다. 그런데 개중에는 권사나 집사, 평 교인들이 인간적인 자기들의 목사에 대한 나쁜 정서를 간접적으로 장로에게 속닥거려서 목사와 장로사이를 이간시켜 간혹 교회질서가 무너지는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신앙 공동체이긴 하지만, 교회라는 것은 이따금씩 비신앙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것이 교회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육의 몸을 벋어나지 못하고, 땅에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양자는 태어난 배경, 자라난 생육사, 교육정도 등 인격적·신앙적 수련 여하에 따라서 극복도 되고, 또는 극한적으로 피투성이가 나는 난투극도 야기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두 사람 간의 '인간 됨됨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을 아는 자면 서로 존경하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지속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부단히 자기 뜻을 비우고, 주님의 뜻에 복종해 한결같이 성령의 도우심에 순복(성령의 감동)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D. Bonhoeffer는 그의 「신도의 공동생활」이란 저서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며,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만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간의 조화와 사귐은 본회퍼가 말하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고 못 되는데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귐은 이상(理想)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현실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귐은 심적(psychic)인 현실이 아니고, 영적(pneumatic)인 현실이라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의미는 목사와 장로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서 계시기 때문에 목사는 장로를 사랑하고, 장로는 목사를 사랑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 그 중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 먹히지 않아 한국교회는 위기다.  

조화의 사례

대 선배 목사이신 채필근(蔡弼近) 목사님과 조만식(曺晩植) 장로님간의 정감 어린 가교의 일화를 이야기 해보자. 채필근 목사님은 1925에 동경제국대학교 철학과를 나온 수재로서 120년간 우리나라 신교 역사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인이었고, 교회를 섬기고, 신학교육 및 일반대학의 교수로서 일생을 보내신 어른이시다. 한편 古堂 조만식 장로님은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신 분으로서 교육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옥고를 치렀다. 장로님께서는 해외 망명길이 있었으나 동포들과 함께 살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면서 동고동락하신 장로님이셨다.

채필근 목사님과 조만식 장로님은 슬픔과 기쁨을 같이 나눈 그 시대의 신앙이나 이념 등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셨다. 나는 1960년대 대구제일교회 靜流 이상근 목사님의 목양 터에서 전도사로서, 교육목사로서 봉직했다. 당시 이상근 목사님께로부터 들은 기지와 익살스런 '에피소드'의 이야기가 있다.(이 목사님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했던 때에 선배목사님과 교분을 통한 일화를 들었다고 하니 이때가 1940~1945년간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교회 제직회 간친회가 있어서 조만식 장로님께서 먼저 오셔서 저녁을 자시고 계실 때, 초대 받은 채필근 목사님께서 늦게 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하는 방으로 들어가시면서, 채 목사님께서 조 장로님을 보시면서 "조! 晩食(늦게까지 식사하시는 것)하는 사람 좀 보소!"라고 농담을 하시니, 조 장로님께서 응답으로 하시는 말씀이 "채! 필(畢)하기도 전에(저녁 식사가 마치기도 전에 온다는 의미)오는 것 좀 보소"라고 말했다. 목사와 장로 간에 아름다운 정경은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을 만한 흐뭇한 이야기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딤전5:22)

이미 장로가 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마는 앞으로는 잘 세우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딤전5:22)고 했다. 장로를 임직할 때부터 신중히 하여 사건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래 내용은 목회경험과 신학교수를 거치면서, 이순(耳順)을 넘기까지 인생역정과 기독교 대학 교수의 체험을 통해서 얻은 고백적인 결론이다.  

정치형 장로
특히 장로들이 요사이 노회 산하 "장로회"라든지 전국 "장로회"라든지 이런 조직체는 신앙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에 도움 되는 친교와 건설적인 교회 봉사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노회 임원 선거, 총대선거, 총회 무슨 부서에 들어가기 위한 것, 문제 교회를 위한 재판국 '로비'하는 것 및 총회장 선거 등, 전부 교회 정치적 행위를 위한 조직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임에 들락날락하는 장로치고 교회나 목사님 보필이 좋다고 하는 장로는 별로 많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건전한 교회발전을 위한 친교와 연구 모임으로 개편했으면 좋겠다. 나쁜 의미에서 ‘정치 형 장로’는 득보다 해가 더 많다.

왕초형 장로
기독교로 전향하기 전 어떤 직종에 종사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 교회 장로는 신앙인이 되기 전에 들리는 말에, '깡패출신'이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나, 역시 장로가 되어서 당회에서 당회장 목사에게 협박하고,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어서 결국 위임목사가 그 교회에 있지 못하고 쫓겨났다. 다른 장로들에게도 무력으로 옷을 찢고,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등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어떤 직종에든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 새 사람(중생자)이 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참다운 주의 종으로 우리는 존경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더러 이런 경우도 있다는 것을 유념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철새형 장로
다른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서 이명 온 장로나, 타 교회에서 장로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이명도 없이 온 장로는 잘 보살피고 신중히 장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 가면 안 새는가." 우선 와서 다소곳이 있지만, 장로 임직한 후에는 뒤틀리면 옛날 이전 교회 버릇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편이 구차하게 되면 또 다른 교회로 날아간다.

일확천금형 장로
불로소득자(땅 투기자, 복권을 상습적으로 사는 자), 도덕성의 결함이 음흉하게 나타난다.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은밀히 치부하려는 인생관이니, 매사에 사람들 앞에서 성스런 척 한다. 위선적이라는 말이다. 위선자는 예수님이 가장 가증이 여기고 가장 싫어하셨다.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예컨대 공적 교회문서인 '당회록'을 위조하는 것에 동조한다든지 말이다.

무골호인형 장로
법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무골호인'이다. 그의 인간성은 하염없이 좋다. 그러나 '의(義)와 불의'(不義), '선(善)과 악'(惡)의 판단 기준이 모호할 때가 많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차이점을 분간 못한다.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자고 한다. 신약성서시대는 '개인윤리'에 대한 교훈의 말씀만이 있었고, 당시는 주의 재림사상이 강했기에 '사회윤리'에 대한 이해를 인식할 필요가 없었다.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를 용허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데, 주님이 오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니 그때 가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오히려 사회윤리 사상과 교훈의 말씀이 많이 있다. 일제 36년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의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구약성서를 못 읽게 한 이유가 구약에는 민족사상과 사회정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적으로도 하나님의 공의(정의)는 사랑의 다른 면임에도, 목회목사들이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구분치 않고, 사랑하라고만 설교하니 교인들은 구별치 못하고 교회 내나, 교계의 비리와 범법자를 무조건 사랑하고 덮어주자고 한다.

'자기사랑'의 개념도 무조건 희생해서 이웃을 사랑하자고만 설교한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다. 많은 목회목사들이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Love your neighbor as you love yourself- 막12:31)는 둘째계명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설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자기부터 사랑하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자가 되란 말씀이 아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치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아끼고 자기 존엄성이 없는 사람이 자살도 쉽게 하는 사람이다. 내 이웃을 내만큼 사랑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주님은 자기 사랑의 수준만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개념을 잘못 가르쳤기에, 사회윤리적인 공공의 적을 그냥 덮어두자고 한다. 개인윤리적인 차원으로 생각하고 묻어두니 교회 내에도 교계에도 점점 썩어가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만큼 썩어서 냄새가 불신사회까지 퍼졌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독일의 법철학자 Carl Schmidt의 이론에 의하면, "'친구와 적'(友와 敵)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에 사회의 혼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의 뜻은 마치 이단 사설은 자기들의 신관이나 도덕관이나 내세관 등 신조를 분명히 밝히기 때문에 이단 사설을 쉽게 식별하고 신앙의 혼돈을 막을 수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젠 교회 내나 교계의 비리와 부도덕, 범법자는 가려서 엄히 구별하는 것이 교회의 성성(聖性)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수성가형 장로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에 지지리도 가난했던,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정신적 외상"(Traumatic Event)으로 무의식 속에 잠재하면서, 나중에 성인이 되어 예수 믿고 성공했다고 해도 심리학자들은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지만 이를 문제시하고 있다. C. Jung같은 심리학자는 이런 자가 성인이 되어도, 마치 나무위에 올라간 자신을 밑에서 나무를 흔들어 자기를 떨어트리지나 않을까 불안하게 생각하고 '물욕'과 '자아집착'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 자를 한국교회에 이름난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것을 도적질하고도 회개는커녕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악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신 교훈은 청소년 때, 가난하여 자수성가한 후에도 정신적 외상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견물생심형 장로
교회 내의 재정부장, 건축부장, 각 부장들은 거의 장로들이 책임을 맡아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니 장로들이 직접 현금을 출납하니 부정과 비리, 범법의 유혹을 받게 된다. 큰 교회나 단체 장로의 부정이 이 같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필히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못 받고, 중생(重生)하지 못한 자가 아닐까. 아니면 그 은혜가 가을 국화처럼 시들어 향기도 없고 꽃도 아름답지 못한 것과 같다. 한석봉 모처럼 금을 돌같이 여겨야 할 장로가 현금에 눈이 어두워 가롯 유다처럼 되는 곳이 오늘의 한국교회다. 공금에 대한 특별한 제도적 장치와 행정의 투명성을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가 이런 사례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좁쌀뱅이 장로
이런 자는 조선조시대의 "사또, 지당 하외다" 하는 '이방'형의 사람으로 아부를 지나치게 하는 자 및 매사에 소견이 좁고 언행이 잔 사람이다. 그러니 때에 따라 '일구이언'을 하는 자다. 이런 자에게 나는 이용당해 많은 고생을 한 바 있다. 목사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장로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을 배웠다. 위의 8가지 형을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서 또 생각해보고 해서, 장로선택 및 안수하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하겠다.(딤전3:1-13, 5:17-18 참조.)

심리학적인 접근

신앙이 시든 장로를 위해서 목사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혀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이런 방법을 접근해보도록 제안해 보고 싶다. 여기서 나는 심리학적인 접근을 소개하고 이 글을 마칠까한다. 미국의 William E. Hulme 심리학자의 저서 「Creative Loneliness」라는 책에 의하면, 내적대화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The Inner Dialog: Relating to God), 친교의 개발(The Development of the Intimacy)을 제안했는데 친교의 개념을 Hulme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했다.

인간은 서로 만나지만 자기를 폐쇄적으로 감추고, 피상적으로 만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친밀히 참 만나서 친분을 나누기 위해서서는 저마다 자기를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친분은 노출(폭로)을 의미한다"(Intimacy means exposure).

제1단계: 나와 네가 만나서 저마다 자기감정(own feeling)을 '폭로'하란 것이다. 상대는 그의 솔직한 감정의 '폭로'를 듣고 자기의 감정을 또한 표출하라는 것이다.

제2단계: 그러면 기분 나쁜 느낌을 서로 교환하면서 서로 간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드리게 된다는 것이다(Acceptance).

제3단계: 기분 나쁜 정서들을 서로 교환해서 자기 마음에 받아들여 알게 되면 "아! 그래서 네가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구나!"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참으로 솔직히 알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4단계: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의 별명이라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일직이 말한 바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forgiveness)를 수용한다는 의미란 것이다.

제5단계: 용서는 사랑이란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호젓한 호수가나 조용한 공원이나 분위기 있는 곳을 택해서 대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했다. 이 원리는 목사와 장로 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계층에도 속한다. 이 예는 인간간계의 발전을 위한 Hulme의 제시다.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31  교회가기 싫은 이유(77-3 말 많은 전도사(전도하는 사람) 너무 싫어!).    administrator 2009/10/08 17 780
30  교회가기 싫은 이유(77-2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어 교회 못 간다).    administrator 2009/10/08 20 648
29  교회가기 싫은 이유(77-1 노방전도 모습 보면 만정이 딱 떨어진다).    administrator 2009/10/08 24 699
28  기독교 상식    administrator 2009/10/08 25 728
27  설교준비 이렇게 하라    administrator 2009/09/22 25 644
26  교회 돌파구 ‘전도뿐’    administrator 2009/09/22 22 713
25  설교학의 교과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administrator 2009/09/22 20 686
24  “설교란 무엇인가?    administrator 2009/09/22 26 751
 장로 안수    administrator 2009/09/14 20 644
22  조각목    administrator 2009/08/30 21 809
21  아멘을 잘하는 성도가 공부도 잘한다”    administrator 2009/08/22 24 870
20  머슴을 섬긴 주인 조 덕 삼 (1867~1919)    administrator 2009/08/22 25 676
19  주승중 교수 “성경에 충실한 것이 가장 예언적인 설교”    administrator 2009/08/13 25 791
18  pst/십자가의 재의미    administrator 2009/07/14 22 750
17  주님의 보혈    administrator 2009/07/14 26 1057
1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음악    administrator 2009/07/10 25 817
15  사순절 QT    administrator 2009/07/10 25 743
14  너 주님의 가시관 써 보라    administrator 2009/07/10 20 895
13  나의 주 나의 하나님    administrator 2009/07/10 27 833
12  기독시 : 오늘을 비관하기에는.....,/작자미상    administrator 2009/07/10 21 844

    목록보기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1][2][3][4] 5 [6]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